< 오후 4시_어느 날의 수수께끼 >

오후 4시_어느 날의 수수께끼
4:00 PM_The Enigma of a Day

김혜숙_민경_손정은_정희정 展
2021.12.01 ▶ 2021.12.12 | 12:00 – 19:00 | 월요일 휴관

기획
손정은

참여작가
김혜숙_민경_손정은_정희정

주최
A BUNKER

A BUNKER
서울 마포구 잔다리로 70 (서교동 465-7번지)
Tel. 010-8782-0122
http://www.a-bunker.com

“…모든 것이 탐색하는 듯한 신비로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 때 나는 그 장소의 모퉁이와 기둥마다, 그리고 창문마다 모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챘다. 아울러 그 영혼을 꿰뚫어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순간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형태를 창조하도록 부추기는 신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은 조르주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가 1913년에 <신비와 창조>라는 글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그는 “예술은 낯선 순간을 포착하는 운명의 그물”이라고 말하면서 예술이 포착하는 순간은 절대 꿈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이상한 예술적 순간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후 4시_어느 날의 수수께끼”는 A BUNKER의 독특한 공간구조에 대한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하였다. A BUNKER는 낡은 건물의 지하에 위치한 창문이 없는, 바닥과 벽이 건물의 외벽과 동일한 벽돌로 만들어져 공간의 안과 밖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김혜숙, 민경, 손정은, 정희정 작가는 벽돌로 만들어진 밀폐된 지하의 공간 속에서 서로의 작품이 뒤섞이는 낯설지만 창조적인 과정을 통해, 도시의 일상과 예술적 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한다.

“오후 4시”는 정희정 작가의 사진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오후 4시는 낮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황혼을 앞 둔 경계에 놓인 시간대이다. 정희정 작가의 도시풍경을 보여주는 사진 액자들은 창문이 없는 A BUNKER 공간의 벽돌에 걸리며 일종의 유리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정희정 작가의 작품은 실제 풍경을 찍은 사진이지만, 거울과 같이 도시인들의 멜랑콜리한 내면을 비춘다. “풍경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의 눈은 이 세상을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려하지 않는다. 사물에 대한 의인적 체험을 통해 자기를 비추려 한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풍경이 바로 세상의 풍경인 것이다. 땅끝 마을이나 고형 혹은 남극이나 달표면같은 장소는 내 마음 속이 아니라면 어디에 있겠는가? 풍경이란 내가 창조하는 인상이다. 내 안에서 너를 여는 먼 곳이다” (정희정 작가노트)

손정은 작가는 A BUNKER 공간에 made in china의 플라스틱 나무를 들여놓는데, 전시기간인 12월에는 이미 도시에 녹색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썩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푸르름으로 A BUNKER 내부는 밀폐된 지하공간이 아닌 봄, 혹은 여름의 공원으로 바뀐다. 한겨울의 냉기가 흐르는 지하 공간의 플라스틱 녹색 정원과, 죽어서 박제된 새, 그리고 인공의 자연음은 정희정 작가의 멜랑콜리한 사진 속 풍경을, 몸으로 감각하는 현재의 시간으로 만들어준다.

백색 공간, 즉 갤러리라면 마땅히 작품이 걸려야 하는 곳이겠지만, A BUNKER는 기둥을 비롯한 자투리 공간들이 백색이다. 김혜숙 작가는 그 자투리의 공간에 그녀 특유의 공간과 장소에 대한 드로잉을 설치한다. 연작 드로잉은 공간을 가리거나 꾸며주는 건축 재료가 재구성된 작업으로 A BUNKER의 강한 붉은 벽돌 벽과 바닥, 그 위에 세워진 플라스틱 나무,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창문같은 풍경 사진들 사이에서 연기처럼, 냄새처럼 공간에 스며든다. “공간을 선과 면으로 인식한다. 화면은 겹을 쌓으며 나름의 시각적 운율로 만들어 내는데, 공간에 쌓인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는 공간을 완성이 아니라 진행형으로 바라보기 때문인데 나에게 회화란 눈의 촉각을 기억하는 손의 감각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공간은 이런 감각들이 모여 더하고 나누고 합쳐지며 시간이란 선상에서 변화 가능한 존재로 여러 개의 겹을 통해 고정된 화면에 흐름을 담아내고 있다” (김혜숙 작가노트)

민 경 작가는 탈 혹은 섬 형태의 오브제를 설치하고 이와 함께 낭독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사라지고 없는 기억의 공간, 여전히 존재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관한 이미지가 몸을 입고 소리를 얻는다. 대독자代讀者로서 존재하는 작가는 이야기를 읊으며 유령처럼 오브제와 작품을 거니는 하나의 기묘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공중을 떠도는 집과 이주, 이동에 관한 문장들이 세 작가가 만들어 낸 공간 풍경과 겹치며 한시적 사유 공간을 넘나든다.

“어느 날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a Day)는 조르주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창작자에게 신비로운 영감을 불러넣어주는 장소의 이미지. 정희정 작가의 작품과, 조르주 데 키리코의 작품의 제목을 결합하여 만든 “오후 4시_어느 날의 수수께끼”는 네 명의 작가들의 서로 다른 언어가 특정 기간동안 서로 만나고 충돌하며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하는 설치-퍼포먼스 작품이다. 창문 없는 방, 지하, 붉은 벽돌의 외벽을 내부에 품고 있는 공간, 의 말처럼 장소의 모퉁이와 기둥마다 모두 영혼이 깃들어 있을 법한 그런 공간…. 작가들은 그 공간 속에서 언젠가는 사라지고 없어질 장소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2021년 4월 온수공간의 “아트리피케이션”과, 8월 장위동 빈집에서 열린 “빈집-예술가 유령”의 연장선에 있는 “오후 4시_어느 날의 수수께끼”는, 예술과 도시에 대한 올해의 마지막 기획으로서, A BUNKER 손도희 대표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인연이 아니었더라면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를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들의 만남은 “해부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 만큼이나 낯설지만, 서울이라는 대도시,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모든 것이 자본적 가치로 환원되는 현실 속에서도 예술을 지속하고자 하는 공간운영자와 작가들의 예술에 대한 의지로, “예술의 낯선 순간을 포착하는 운명의 그물”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A BUNKER 손도희 대표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후 4시
전시 전경001
전시전경016
전시전경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