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정 Lee Hanjeong

나의 작업은 차창 밖으로 무수히 지나치는 자연의 풍경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과거의 내가 보고 경험한 풍경들이 기억 속에 쌓여 축적되었다가 현재의 내가 가진 감정이 더해져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생명의 시작이며 나의 존재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자연의 기운과 생동감을 빌어서 나의 내면의 공간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하늘과 맞닿은 드넓은 땅에 어떠한 건물이나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새롭고 낯선 풍경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하고 끝없는 자연을 바라보며, 발에 채이는 돌과 흙더미,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 곁으로 무수히 자라난 잡초 따위에 깃든 생명의 울림이 내 안으로 들어와있음을 느낀다.

수행하듯 하나하나 쌓아 올린 먹점은 나무가 되고, 숲이 되고, 들판이 되고, 산이 되어 또 다른 생명체로 발현되고, 그 위에 더한 색감을 통해 그 생명체가 담고 있는 표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잡초와 마른 나무 무성한 흙 벌판은 오렌지빛 표정을, 침엽수 빽빽하게 자라난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난 바위산은 겨울의 한기가 느껴지는 흰색 빛 표정을, 물을 잔뜩 머금고 햇빛 받아 더욱 선명해진 잔디밭은 초록빛 표정을 짓곤 한다. 자연이 담고 있는 표정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들과 뒤섞여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지금 이 순간에도 고요한 울림으로 쉼 없이 변화하고 있는 자연의 일부를 묵묵히,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호흡의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에 몇 년 간 거주할 기회가 있었다.

 매일매일이 새롭게 숨쉬는 자연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일년 내내 뜨거운 햇살, 그 햇살을 받아 거대하고 울창한 나무 숲, 파란 하늘과 바다, 가도가도 끝이 안 보이는 오렌지 빛 벌판, 그 틈을 비집고 자라던 무성한 잡초와 선인장, 바람이 나뭇잎에 스치는 소리, 풀벌레 소리, 흙 내음, 나무 내음, 풀 내음.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고요한 자연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해본다. 한 호흡, 한 호흡 들이키고 내쉴 때 마다 자연이 내뱉는 잔잔한 울림이 몸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것 같다.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하는 이 순간만큼은 주변의 풍경, 공기, 소리와 같은 모든 것들과 서로 깊이 연결되어 함께 존재하는 생명체이며, 쉼 없이 변화하는 계절 속에서 어느 한 순간을 공유하는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돌이켜보면 매순간이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었다. 자연은 나에게 아무런 말이 없지만, 또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 안에서 사색하는 시간은 참으로 고요하고 평온하다.

 먹이라는 재료가 지닌 깊은 역사성을 빌어 수백 년 수천 년 간 쌓이고 다듬어졌을 바위, 땅, 숲의 모습을 표현해본다. 무수히 쌓인 먹점 하나하나가 그 생명체의 오랜 역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점이 모이고 쌓여 덩어리를 이루다가 옅어지고 풀어지듯이, 바위도, 산도, 나무도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을까.

 이번 전시를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 여정의 일부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했던 2년은 짧지만 강렬하고 매우 인상깊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추억을 어렵사리 붙잡으며 지난 몇 년 간 행복한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또다른 곳에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사유하는 시간은 앞으로도 이어지겠지만,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과 요세미티 안 거대한 숲에서 느꼈던 생명의 에너지는 오래도록 긴 여운으로 남을 것 같다.

산 | 한지에 수묵채색, 2021 | 60X100cm
숲 | 한지에 수묵채색, 2021 | 33.3X53cm
숲 | 한지에 수묵채색, 2021 | 40X50cm
숲 | 한지에 수묵채색, 2021 | 40X50cm
숲 | 한지에 수묵채색, 2021 | 40X50cm
숲 | 한지에 수묵채색, 2021 | 40X50cm
숲 | 한지에 수묵채색, 2021 | 45X100cm
숲 | 한지에 수묵채색, 2021 | 60X50cm
호수 | 한지에 수묵채색, 2021 | 33.3X53cm
호수 | 한지에 수묵채색, 2020 | 55.5X122cm
호숫가 숲 | 한지에 수묵채색, 2020 | 40X60cm

참고 이미지

들_한지에 수묵채색_40x50cm_2019
산_한지에 수묵채색_40x40cm_2020_
숲_한지에 수묵채색_40X90cm_2020
숲_한지에 수묵채색_41x53cm_2020(4)
숲_한지에 수묵채색_41x53cm_2020(4)
호수_한지에 수묵채색_36X51cm_2020
호수_한지에 수묵채색_40.5x110cm_2018
호숫가 숲_한지에 수묵채색_40x60cm_2020